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스쿠 다 가마 (문단 편집) === 인도 원정의 배경과 1차 원정 ===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피렌체 공화국|피렌체]],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뭇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안 그래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통념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인 무역 방해를 하진 않았으나 [[통행료]]는 올렸는데 이는 그대로 유럽에 전가되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우리가 그냥 향신료 산지까지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한 것.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인판트 동 엔히크|엔히크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고 4척의 범선과 170여명의 선원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쿠 다 가마는 여행기를 썼는데, 인도 도착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랍인]] 상인[* [[카스티야어]]와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둘이었다. 이들이 웬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던진 말은 "망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사제왕 요한|기독교도]]와 향신료를 찾아 여기까지 왔소."였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튀니지는 이탈리아 건너의 지중해 국가이다. 당시 아랍상인들의 활동영역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참고로 당대의 아랍 상인들은 굳이 아프리카를 빙 둘러 희망봉을 지나지 않고도 육로를 통해 북아프리카→중근동→페르시아→인도로 직접 올 수 있었다.(애초에 육로를 사용해야 하지만 이 쪽이 훨씬 가깝다.) 이 때문에 인도로 갈 수 없던 유럽 상인들과는 달리 지중해 근처에서 활동하던(카스티야어와 이탈리아어도 할 수 있던) 튀니지 상인이 인도까지 직접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이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이전, 이미 약 8세기 동안 아랍 상인들은 인도양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했다. 아랍 상인들이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활발하게 무역 활동을 했느냐 하면, 서기 9세기에 이미 아랍 학자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신라]]에 대해 "날씨가 좋고 황금이 많이 나오며 아름답게 생긴 사람들이 많아서 이슬람교도들이 이 나라를 한 번 방문하면 정착하려고 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반면 당시 유럽인들은 한반도의 존재조차 몰랐던 때였다.] 첫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 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랍상인들이 보기엔 탐험대의 무역상품이 한심할 정도로 저품질이었고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쿠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이런 옷감은 [[거지]]도 안 입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옷감의 품질이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덥고 습한 인도의 기후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약 300년 후인 18세기 초, 영국 상인들이 중국 남부 광저우로 수출한 모직물도 중국 남부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 때문에 거의 안 팔렸다고 한다. 출처: 르네상스의 어둠/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59쪽] 그리고는 이런 건 집어치우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금이나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당시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내려져온 유서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했고,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을 휩쓴 캘리코 면직물의 본고장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외에도 당시의 유럽문명은 선박과 화약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게 무역이라기보다는 지하철에서 꼬질꼬질한 잡동사니나 껌을 파는 식의 동냥질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꽉 잡고 있던 아랍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고함을 칠 정도로 격렬한 증오심[*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살인과 약탈 등등 사악한 깽판을 친 전과가 있었고 북아프리카인이나 아랍인들과도 이미 마찰이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포르투갈 측에서도 할말이 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인 및 아랍인 상인들 또한 포르투갈을 포함한 지중해 해안가에 어마어마한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평소에 기독교인 노예무역 같은 무역에 종사하다가 사정이 궁해지면 바로 돌변해서 기독교도 상선을 납치해서 노예화 하거나 해안가를 약탈하니 서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때문에 통상교역을 하는데는 실패했고 함대는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길에 올라서 1499년 9월 즈음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가마 일행의 첫 항해 귀국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도중의 고초와 괴혈병에 시달린 나머지 선원이 많이 죽었고 바스쿠 다 가마의 형도 리스본 귀환 무렵에 병사했다. 배를 몰 선원이 30여명만 남을 정도로 부족해져서 배 한척을 침몰시키고 2척만이 살아돌아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중계무역을 하면서 얻은 수확으로 출자자들이 60배가 넘는 배당을 받을 정도의 수익은 올리긴 했다.[*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이 동방으로 계속 무역선을 보냈었다. 일단 동방으로 가서 [[향신료]]를 싣고 돌아오기만 하면, 항해에 투자한 본전을 건지고도 남았으니까.] 귀환한 바스쿠 다 가마는 국왕 [[마누엘 1세]]로부터 'Dom' 칭호와 함께 거국적인 환영식, 영웅 대접을 받았고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지위도 하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